제14장

짝! 청명한 소리가 거실에 울려 퍼졌고, 강예성의 뺨에는 금세 선명한 손자국이 찍혔다.

그녀는 얻어맞고는 멍해졌다. 어릴 때부터 온 가족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자라온 그녀였다. 맞기는커녕 심한 말 한마디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그 따귀를 때린 사람이 바로 할아버님이라니. 집안에서 가장 존경받는 분이자, 늘 자애롭고 불심이 깊던 그분이 자신을 때린 것이다.

그녀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믿을 수 없다는 듯이 할아버님을 쳐다보았다. 울음조차 잊은 채였다.

“이 따귀는 네게 경고하는 것이다. 강씨 집안사람이라면 이리 교양 없이 굴어서는 안 되고, 형님 부부의 일에 끼어들어서는 더더욱 안 된다는 걸 말이다. 너의 그 안하무인인 성격도 이제는 고쳐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조만간 큰코다칠 게야.”

강예성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너무나 억울했지만 감히 울지도 못했다. 뺨은 불에 덴 듯 화끈거렸다.

할아버님은 이번에 정말로 화가 나신 듯했다.

그 순간, 김지연에 대한 그녀의 증오는 몇 배나 더 커졌다. 전부 저 여자 때문에 맞은 것이다. 오늘 받은 설움은 언젠가 반드시 되갚아주리라.

정지미는 회장님이 또 손을 들까 싶어 얼른 강예성을 자기 쪽으로 잡아당겼다.

“아버님, 화 푸세요. 예성이 데리고 먼저 올라가서 약 먹일게요. 애가 오늘 열에 들떠서 헛소리를 했나 봐요. 나중에 제가 따끔하게 가르치겠습니다.”

회장님이 코웃음을 쳤다.

“자식을 오냐오냐 키우면 자식을 죽이는 것과 같다. 계속 그렇게 감싸고돌아 봐라. 강씨 집안 대문을 나서는 순간, 남들이 알아서 네 딸을 가르쳐 줄 테니.”

정지미는 감히 대꾸하지 못했다. 이 집안에서 강 회장님의 뜻을 거스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회장님은 손녀를 꾸짖고 나서 김지연을 향해 불렀다. “얘야, 이리 오너라.”

방금 전과는 완전히 다른 말투였다. 눈빛에도 자애로움이 가득했다.

김지연은 그를 따라 서재로 들어갔다.

“아가야, 할아비가 예성이를 대신해서 사과하마. 용서해 달라고는 안 하겠다. 이 할아비 체면을 봐서라도, 태준이한테까지 화를 내지는 말아주겠니?”

김지연은 죄책감이 들었다. 방금 할아버님이 내려오시는 걸 봤을 때, 연기한 부분이 있었다는 걸 부정할 수 없었다. 할아버님은 진심으로 자신을 아껴주시는데, 자신은 그분의 신뢰를 이용해 강예성에게 맞섰던 것이다.

“할아버님, 그러지 않을게요.”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나지막이 대답했다.

“젊은 부부가 다투기라도 한 게냐?”

김지연은 순간 움찔했다. 강태준이 할아버님께 무슨 말을 한 거지?

“그놈이 아침부터 나한테 전화를 했더구나. 네가 저택에 혼자 있으면 심심할 테니 본가로 데려오라고 말이다. 그 말을 듣자마자 녀석이 뭔가 잘못했다는 걸 직감했지. 이 늙은이를 내세워서 아내를 달래려는 게 아니고 뭐겠느냐. 못난 놈 같으니!”

김지연은 잠시 침묵했다. 할아버님이 걱정하실까 봐 거짓말을 했다.

“할아버님, 정말 아니에요. 저희 둘 잘 지내요.”

“잘 지내면 됐다. 어서 빨리 증손자나 안겨다오. 그래야 내가 저세상 가서 네 할미 얼굴이라도 보지.”

김지연은 고개를 숙인 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평소 같았으면 듣기 좋은 말이라도 해서 할아버님을 달래드렸을 것이다. 그녀는 아랫배를 매만지며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나중에 두 사람이 이혼해야 한다는 사실을 어떻게 말씀드려야 할지 막막했다.

김지연은 본가에서 며칠을 머물렀다. 매일 회장님을 모시고 글씨 연습을 하거나 화초에 물을 주는 게 일상이었다. 강예성은 그날 한바탕 소동을 겪은 후로는 대놓고 그녀를 괴롭히지 못했다. 며칠 동안 열이 나서 그럴 기운도 없었던 듯했다.

그녀는 강태준에게 메시지를 여러 통 보냈지만 감감무소식이었다. 답장 한 통 오지 않았다. 언제 돌아오는지 물어보려고 전화를 걸었다. 이혼 서류 절차도 일정에 올려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화를 받은 사람은 강 비서였다.

“사모님, 강 대표님께서는 지금 회의 중이십니다. 급한 일이 아니시라면, 끝나고 말씀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반대편에서, 강정우는 전화를 끊고 강태준에게 휴대폰을 돌려주며 울상을 지었다.

“강 대표님, 저희 언제 돌아갑니까?”

이제 강 비서도 약혼녀가 있는 몸이었다. 대표님의 말 한마디에 이불 속에서 불려 나와 짐 쌀 시간도 없이 B시 출장길에 올랐으니, 속으로 불만이 쌓였지만 감히 말은 못 했다.

강태준은 소파에 몸을 기댄 채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그의 눈빛이 흐릿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눈치 빠른 강정우는 그것이 사모님과의 카톡 대화창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방금 중소 규모의 회사를 하나 인수했는데, 원래 그가 직접 나설 일은 아니었다. 강씨 그룹에는 유능한 직원이 넘쳐났고, 이 정도 일은 아랫사람에게 맡겨도 충분했다.

강 대표님이 마음을 바꿔 굳이 직접 오겠다고 하신 데다, 사모님 전화까지 피하는 걸 보니, 강정우는 두 사람이 싸웠다고 짐작했다.

“강 대표님, 사모님께서 대표님이 돌아오시길 무척 기다리시는 것 같습니다.”

그는 아부를 한마디 던졌다. 물론 더着急한 건 자기 자신이었다. 약혼녀가 하루에도 열 번 넘게 전화를 걸어 재촉하고 있었으니까.

강태준이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 “당연히着急하겠지.”

자기가 돌아가서 이혼해 주길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강정우는 자신의 아부가 완전히 빗나갔다는 사실을 아직 깨닫지 못했다. 방향을 완전히 잘못 잡은 것이다.

“그럼 제가 B시 특산품이라도 좀 사서 사모님께 갖다 드릴까요?”

강태준은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불을 붙이고는 깊게 빨아들였다.

“본가에 전화해서 그 여자 요 며칠 어떤지 알아봐. 어떻게 물어봐야 하는지는 잘 알겠지.”

말을 마친 그는 강정우에게 눈짓을 보냈다.

강정우는 5년 넘게 그를 모시며 대표님의 성격을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었다. 눈빛 하나만으로도 요지를 알아챌 수 있었다. 그는 OK 사인을 보냈다.

“강 대표님, 걱정 마십시오. 사모님께서 모르시게 하겠습니다.”

그는 조금 의아했다. 대표님은明明히 사모님이 며칠간 뭘 했는지 궁금해하면서, 직접 묻지는 않고 자신을 시켜 몰래 떠보게 하다니.

강태준이 떠난 지 어느덧 보름이 흘렀다. 김지연은 수없이 전화를 걸었지만 받는 사람은 늘 강 비서였고, 대답은 항상 ‘강 대표님은 회의 중’이었다. 대체 얼마나 큰 프로젝트이기에 총수가 보름이나 자리를 비워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어느덧 정기 검진을 받아야 할 때가 되었다.

김지연은 전에 다니던 병원에 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강씨 집안과 아는 사람이 있는 곳이라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 않았다. 그때 문득 유수현의 사촌 동생인 유수빈이 외곽의 한 사립 병원에서 의사 선생님으로 일하고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마침 그녀는 산부인과 의사였다.

유수빈은 김지연과 나이가 비슷했고, 유수현의 집에서 몇 번 만난 적이 있었다. 두 사람은 성격이 잘 맞아 이야기도 잘 통했지만, 그녀가 평소 일이 너무 바빠 따로 약속을 잡기는 어려웠다.

김지연은 어차피 할 일도 없어서 직접 차를 몰고 병원으로 그녀를 찾아갔다.

병원은 위치가 다소 외진 데다 사립이라 비용이 공립 병원보다 몇 배나 비쌌다. 이곳에서 아가를 낳는 산모가 많지 않아 자리가 비교적 넉넉했고, 유수빈은 바로 그녀의 차트를 만들어 주었다.

산부인과 검진은 유수빈이 직접 해주었다.

“다른 산모들은 다들 여보랑 같이 검진받으러 오는데, 너는 참 대단하다. 남편 몰래 숨어서 오고.”

김지연은 검진용 침대에 누워 태아 심음 측정기에서 들려오는 쿵, 쿵, 쿵 하는 심장 소리를 들으며 저도 모르게 마음이 들떴다.

그녀는 휴대폰을 꺼내 그 소리를 녹음했다. 이 순간, 그녀 역시 강태준과 이 기쁨을 나누고 싶었다. ‘이것 봐, 우리 아가 정말 건강하지? 심장 소리가 얼마나 힘찬지 몰라.’ 하고 말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윤진아가 보낸 초음파 사진을 떠올리자 심장이 다시 차갑게 식었다. 그는 듣고 싶어 하지 않을 것이다.

이 아가는 그가 사랑하는 여자를 아내로 맞이하는 데 걸림돌이 될 뿐,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할 것이다.

“수빈아, 우리 아가 위치는 어때? 아직도 태반이 아래쪽에 있어?”

유수빈은 기계를 정리하며 차트에 빠르게 무언가를 휘갈겨 썼다.

“걱정 마. 이미 위로 잘 올라왔고, 모든 게 다 정상이야. 즐거운 마음만 유지하면 돼. 네가 즐거우면 아가도 즐거울 거야.”

그러면서 그녀의 아랫배를 가볍게 톡톡 두드렸다.

“그렇지, 우리 조카님?”

김지연은 저도 모르게 빙그레 웃었다. “어떻게 조카인 줄 알아? 조카딸일 수도 있잖아.”

유수빈이 웃으며 농담을 던졌다. “너 그런 말 못 들어봤어? 그 남자가 미우면 아들을 낳아주라고. 아들이 예순 살 됐을 때 책상 치고, 컵 던지고, 집 달라, 차 달라, 또….”

거기까지 말하던 유수빈은 말을 잇지 못했다. 강태준에게 없는 게 뭐가 있겠는가. 아들이 집 사달라고 조를까 봐 걱정할 사람도 아니었다.

“그런데, 정말 그 사람한테 알릴 생각 없어?”

바로 그때, 강태준은 경찰서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강 대표님, 사모님께서 차를 몰고 시내에서 멀리 떨어진 산부인과 병원으로 가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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